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 옐친의 의회 해산과 백악관 포격 사태
1993-03-20 — 1993-12-12
최종 갱신
이 문서는 실제 사건·사고를 시간순으로 정리합니다. 편집 시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반드시 밝혀 주세요.
1. 개요[편집]
1993년 3월부터 12월까지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하스불라토프 의장이 이끄는 최고회의가 개혁 노선과 권력 분립을 놓고 충돌하다, 9월 옐친의 의회 해산 포고령에 이어 10월 3~4일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습격과 의회 건물 포격으로 공식 집계 147명이 사망한 러시아 현대 정치 위기다.
2. 전개 과정[편집]
8개 기록 · 1993-03-20 ~ 1993-12-12
옐친, 텔레비전 연설로 '특별 통치 체제' 선포
1993년 3월 20일 옐친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에서 국민투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비상 권한을 갖는 특별 통치 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직전 인민대표대회 임시회기에서 의원들이 대통령 권한을 줄이고 4월 국민투표를 취소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이에 맞선 조치였다. 헌법재판소는 서명된 포고령을 보기도 전에 일부 조치가 위헌이라는 취지의 판단을 내놓았다. 대통령 진영 내부에서도 법적 근거가 약하다는 우려가 있었고 포고령 문서는 다르게 공개되었다. 이 충돌은 개혁 속도와 통치 권한을 둘러싼 대통령과 의회의 갈등이 헌법 위기로 번졌음을 보여 준다.
인민대표대회 탄핵 투표, 필요 표수에 72표 부족해 부결
1993년 3월 28일 인민대표대회는 옐친 탄핵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필요한 3분의 2인 689표에 72표가 모자라 부결되었다. 같은 날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 해임안도 필요 표수를 얻지 못했다. 옐친은 이날 모스크바 시내에서 지지 집회를 열어 세를 과시했다. 탄핵 실패로 양측 모두 결정적 우위를 얻지 못한 채 국민투표로 갈등을 풀자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시점의 근소한 표 차이는 의회 안에 대통령에 맞서는 강경 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함을 드러냈다.
신임 국민투표, 옐친 신임 및 입법부 재선거 요구 다수
1993년 4월 25일 러시아 전역에서 대통령 신임 등을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유권자 다수는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경제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고 새 입법부 선거를 요구하는 쪽도 다수였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신임과 경제 정책 두 항목은 전체 유권자의 과반이 아닌 단순 다수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옐친은 이 결과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지만 의회는 결과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투표로도 권력 갈등이 해소되지 않아 이후 몇 달간 헌법 개정 초안을 둘러싼 대립이 이어졌다.
대통령령 1400호로 인민대표대회와 최고회의 해산
1993년 9월 21일 옐친은 포고령 1400호를 발표해 인민대표대회와 최고회의를 해산하고 헌법 개정 국민투표와 12월 총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당시 효력이 있던 1978년 헌법 조항과 충돌하는 것으로, 헌법재판소는 곧 이 조치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해산 직전 옐친은 루츠코이 부통령의 직무를 정지하려다 의회가 이를 거부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던 상태였다. 이 포고령으로 러시아 정치는 의회 중심의 소비에트식 체제에서 대통령 중심 체제로 향하는 갈림길에 섰다. 의원들은 곧 의회 건물에 모여 포고령을 거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인민대표대회, 옐친 탄핵 결의와 루츠코이의 대통령 직무대행 선언
1993년 9월 23일 의사정족수인 638명의 대의원이 모인 인민대표대회는 옐친 탄핵을 결의하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을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선포했다. 옐친은 같은 날 이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1994년 6월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의회 건물의 전기와 전화 및 온수를 끊고 경찰로 건물을 에워쌌다. 옐친 쪽은 의회가 불법이라고 주장했고 의회 쪽은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맞섰다. 이 시점부터 모스크바에는 사실상 두 개의 권력이 병존했고 폭력 충돌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위대 경찰 저지선 돌파와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습격
1993년 10월 3일 의회 지지 시위대가 의회 건물을 둘러싼 경찰 저지선을 뚫었고, 루츠코이는 발코니에서 시장 사무실과 오스탄키노 방송센터를 장악하라고 호소했다. 알베르트 마카쇼프 장군이 이끈 무장 세력은 저녁에 방송센터를 공격해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외국 기자를 포함해 공식 집계 46명이 숨졌고 방송센터 일부가 파손되어 방송이 중단되었다. 옐친은 같은 날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에 의회 진압을 요청했다. 방송센터 공격은 군이 대통령 편에 설 명분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탱크 포격과 특수부대 진입으로 의회 건물 장악
1993년 10월 4일 중립을 지키던 군이 옐친의 명령에 따라 전차로 의회 건물을 포격하고 특수부대를 투입해 건물을 장악했다. 포격 장면은 CNN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하스불라토프와 루츠코이 등 의회 지도부는 투항해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위기 전체 기간 147명이 숨지고 437명이 다쳤다. 소련 붕괴 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가장 심각한 무력 충돌이었고 이후 러시아 민주주의의 전환점으로 자주 평가된다.
신헌법 국민투표 통과와 총선 실시
1993년 12월 12일 새 헌법을 묻는 국민투표와 연방의회 총선이 함께 치러졌다. 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고 상하원으로 이뤄진 연방의회를 두는 구조를 확립했다. 이로써 소비에트식 권력 체계는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이듬해 2월 국가두마는 사건 관련자 전원에 대한 사면을 결의해 구금된 지도부도 석방되었다. 미국은 옐친의 대응을 지지했으나 러시아 일각에서는 훗날 강력한 대통령 중심 체제가 굳어진 출발점으로 이 사건을 비판한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 옐친의 의회 해산과 백악관 포격 사태, 어떤 사건인가요?
- 1993년 3월부터 12월까지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하스불라토프 의장이 이끄는 최고회의가 개혁 노선과 권력 분립을 놓고 충돌하다, 9월 옐친의 의회 해산 포고령에 이어 10월 3~4일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습격과 의회 건물 포격으로 공식 집계 147명이 사망한 러시아 현대 정치 위기다.
- 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 옐친의 의회 해산과 백악관 포격 사태, 언제 일어났나요?
- 1993-03-20부터 1993-12-12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 옐친의 의회 해산과 백악관 포격 사태,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93-12-12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개선 제안
이 문서에 대한 개선을 제안할 수 있어요. 제안은 관리자 검토 후 반영됩니다.
개선 제안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