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곤 페이퍼 유출과 닉슨 행정부의 보도 금지 소송
1971-06-13 — 1973-05-11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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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1년 6월 다니엘 엘즈버그가 유출한 베트남전 기밀 보고서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하자 닉슨 행정부가 법원에 게재 금지를 요구했으나 연방대법원이 6대3으로 언론 손을 들어 줬고, 엘즈버그 기소는 정부의 불법 공작이 드러나 기각된 사건이다.
2. 전개 과정[편집]
9개 기록 · 1967-06 ~ 1973-05-11
맥나마라, 베트남 개입사 비밀 연구 지시
1967년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 역사를 정리하는 극비 연구를 지시했다. 연구는 1968년 완성돼 47권, 7000쪽이 넘는 분량이 됐고 공식 명칭은 '미·베트남 관계, 1945~1967'이었다. 보고서에는 역대 행정부가 대국민 발언과 달리 전쟁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고 전황 평가가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연구에 참여한 랜드연구소 분석가 다니엘 엘즈버그는 내용을 알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이 문서는 극소수 부처에만 사본이 배포된 기밀 자료였다.
엘즈버그,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보고서 전달
1971년 3월 엘즈버그는 의회와 언론에 보고서를 알리려 했으나 상원 의원들이 움직이지 않자 뉴욕타임스의 닐 시핸 기자에게 접근권을 줬다. 시핸은 문서를 복사해 편집국에 가져갔고 신문사는 수개월간 법률 검토와 기사 작성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신문사 안에서는 간첩법 위반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우려로 변호인단과 경영진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결국 편집진은 공익을 이유로 보도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판단은 훗날 언론이 국가 기밀 보도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식의 선례가 됐다.
뉴욕타임스, 펜타곤 페이퍼 연재 시작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스는 일요판 1면에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연재의 첫 회를 실었다. 기사는 존슨 행정부가 통킹만 사건 이전부터 북베트남 폭격을 준비했고 대국민 약속과 다른 확전 계획이 있었다고 전했다. 닉슨 행정부는 당장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으나 선례가 되면 기밀 관리가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헨리 키신저와 닉슨 측근들은 유출을 막지 못하면 외교적 신뢰가 흔들린다고 우려했다. 신문은 세 번째 회까지 게재한 뒤 정부의 압력에 직면했다.
연방지법, 뉴욕타임스에 게재 중단 임시명령
1971년 6월 15일 뉴욕 연방지방법원의 머리 거페인 판사는 정부 요청을 받아들여 뉴욕타임스의 추가 게재를 일시 금지하는 임시명령을 내렸다. 이는 미국 주요 신문에 대한 첫 사전 검열 성격의 법원 명령이었다. 정부는 간첩법과 국가안보 위해를 근거로 들었고, 신문은 수정헌법 1조의 언론 자유를 내세웠다. 거페인 판사는 이어진 심리에서 정부의 위해 입증이 부족하다고 보았으나 항소심 판단을 위해 금지를 유지했다. 소송은 곧 연방 항소법원과 대법원으로 번졌다.
워싱턴포스트도 보도 시작, 소송 확대
1971년 6월 18일 워싱턴포스트가 별도로 입수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법무부는 즉시 포스트에도 게재 중단을 요구했고 거부당하자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후 보스턴글로브 등 여러 신문이 같은 자료를 이용한 보도를 이어갔고, 정부는 여러 지역 법원에서 동시에 다투게 됐다. 항소법원들의 판단이 엇갈리자 쟁점은 신속히 연방대법원으로 올라갔다. 결국 뉴욕타임스 사건과 워싱턴포스트 사건이 병합 심리되는 이례적 절차가 진행됐다.
엘즈버그, 보스턴에서 자수
1971년 6월 28일 엘즈버그는 보스턴 연방검사실에 출두해 자신이 문서를 유출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도둑질과 간첩법 위반 등 다수 혐의로 기소됐고 유죄가 나오면 최대 115년형까지 가능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전쟁의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며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닉슨 행정부는 그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공작을 구상했다. 이 과정에서 백악관 측근들이 불법적 수단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이후 워터게이트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로 평가된다.
연방대법원, 6대3으로 언론 승소 판결
1971년 6월 26일 변론을 연 연방대법원은 닷새 뒤인 6월 30일 6대3으로 정부의 게재 금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짧은 약식 의견은 사전 검열에는 위헌이라는 강한 추정이 있고 정부가 이를 뒤집을 무거운 입증 책임을 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휴고 블랙과 윌리엄 더글러스 판사 등은 언론이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취지의 보충 의견을 냈다. 이 판결로 신문들은 보도를 이어갔고 사전억제 금지 법리의 대표 판례가 됐다. 다만 사후 처벌 가능성은 열어 둬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백악관 '플러머스', 엘즈버그 정신과의사 사무실 침입
1971년 9월 3일 백악관 특별조사반인 '플러머스' 소속 인물들이 엘즈버그의 정신과 의사 루이스 필딩의 로스앤젤레스 사무실에 침입했다. 이들은 엘즈버그의 평판을 깎을 자료를 찾으려 했다. 침입에는 훗날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는 E. 하워드 헌트와 G. 고든 리디 등이 관여했다. 이 사실은 엘즈버그 재판 중에 드러나 정부의 사법 방해 의혹으로 번졌다. 이 사건은 닉슨 행정부의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불법 공작이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 줬다.
재판부, 정부 불법 행위 이유로 엘즈버그 기소 기각
1973년 5월 11일 윌리엄 번 연방판사는 정부의 불법 행위가 심각하다며 엘즈버그와 공동 피고인 앤서니 루소에 대한 기소를 기각했다. 판사는 정신과 의사 사무실 침입과 불법 도청 기록 은폐 등을 지적하며 정부의 행위가 정의 감각에 충격을 줬다는 취지로 밝혔다. 재판 도중 FBI 국장 자리를 제안하는 접촉 등 판사에 대한 부적절한 접근도 드러났다. 기소 기각은 닉슨 정부의 신뢰를 크게 훼손했고 같은 해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겹쳐 정치적 파장이 커졌다. 이 사건은 비밀 유지와 공익 제보, 언론 자유의 균형에 관한 논쟁의 기준점으로 남았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펜타곤 페이퍼 유출과 닉슨 행정부의 보도 금지 소송, 어떤 사건인가요?
- 1971년 6월 다니엘 엘즈버그가 유출한 베트남전 기밀 보고서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하자 닉슨 행정부가 법원에 게재 금지를 요구했으나 연방대법원이 6대3으로 언론 손을 들어 줬고, 엘즈버그 기소는 정부의 불법 공작이 드러나 기각된 사건이다.
- 펜타곤 페이퍼 유출과 닉슨 행정부의 보도 금지 소송, 언제 일어났나요?
- 1971-06-13부터 1973-05-11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펜타곤 페이퍼 유출과 닉슨 행정부의 보도 금지 소송,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73-05-11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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