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콘트라 사건, 레이건 행정부의 대이란 무기 밀매와 콘트라 자금 전용
1985-08 — 1994-01-18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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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5~86년 레이건 행정부가 인질 석방을 노려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팔고 그 대금 일부를 의회가 금지한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 지원에 전용한 사실이 1986년 11월 폭로되면서 백악관 안보팀이 흔들리고 14명이 기소된 미국 정치 스캔들이다.
2. 전개 과정[편집]
10개 기록 · 1985-08 ~ 1992-12-24
이스라엘 경유 TOW 미사일 이란 인도 시작
1985년 8~9월 이스라엘이 미국산 TOW 대전차미사일 500여 기를 이란에 넘기는 비밀 거래가 시작됐다. 당시 레바논에서는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미국인 인질을 붙잡고 있었고,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의 영향력으로 인질을 풀어 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 미국은 이란에 무기를 팔지 않는다는 공개 방침과 대이란 무기금수 정책을 유지하던 상태여서 이 거래는 정책 모순이었다. 국방·국무부 내부에서도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이 반대했지만 거래는 국가안보회의(NSC) 라인에서 계속 추진됐다. 같은 해 9월 인질 벤저민 위어 목사가 풀려나면서 비밀 채널이 효과가 있다는 인식이 굳어졌다.
레이건, 사후 승인 성격의 대통령 결정문서 서명
1986년 1월 17일 레이건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승인하는 비밀 결정문서에 서명했다. 이 문서는 이미 진행된 이스라엘 경유 거래까지 소급해 정당화하는 성격이 강했고, 의회 상임위에 통보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성됐다. 이후 거래는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고 미 국방부 재고에서 직접 무기를 빼 CIA를 통해 이란에 넘기는 구조로 바뀌었다. 협상 실무는 NSC 보좌관 존 포인덱스터 제독과 NSC 참모 올리버 노스 중령이 맡았다. 이 구조는 훗날 행정부가 의회의 감독을 피했다는 비판의 핵심 근거가 됐다.
맥파레인 전 보좌관의 비밀 테헤란 방문
1986년 5월 말 로버트 맥파레인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노스 중령 등과 함께 위장 신분으로 테헤란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일행은 미국산 호크 미사일 부품을 싣고 갔으며 이란 측 인사와 인질 석방 문제를 협의했다. 이란 측 기대와 미국 측 기대가 크게 어긋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인질 석방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 방문은 행정부가 사실상 테러 단체와 연계된 국가와 무기를 맞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이후 의회 청문회의 주요 쟁점이 됐다. 또 협상 과정에서 이란 측에 부풀려진 가격으로 무기를 넘겨 차익을 챙기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니카라과에서 미 화물기 격추, 하센푸스 생포
1986년 10월 5일 니카라과 상공에서 콘트라 반군에 물자를 투하하던 미국 화물기가 산디니스타 정부군에 격추됐고 탑승자 중 유진 하센푸스가 생존해 생포됐다. 당시 미 의회는 이른바 보랜드 수정안으로 콘트라에 대한 미 정부의 군사 지원을 제한하고 있었다. 하센푸스는 CIA와 연관된 인물들이 이 비행을 관리했다고 진술했고, 정부는 사적 조직의 활동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백악관 NSC 참모진이 민간 네트워크를 통해 콘트라를 지원해 왔다는 의혹이 처음 크게 부각됐다. 한 달도 안 돼 이란 무기 거래가 폭로되면서 두 갈래 의혹이 하나로 합쳐졌다.
레바논 언론 알샤라, 대이란 무기 판매 폭로
1986년 11월 3일 레바논 주간지 알샤라가 미국이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매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맥파레인의 테헤란 방문까지 구체적으로 다뤄 워싱턴에 파장을 일으켰다. 11월 13일 레이건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이란과의 거래가 인질 교환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곧 사실과 어긋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여론조사에서 레이건의 지지율은 한 달 사이 큰 폭으로 떨어졌고 이는 재임 중 최대의 신뢰 위기로 평가된다. 백악관은 증거 인멸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내부 조사에 들어갔다.
콘트라 자금 전용 공식 발표, 포인덱스터 사임·노스 해임
1986년 11월 25일 에드윈 미즈 법무장관은 이란 무기 판매 대금의 일부가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으로 흘러간 사실을 발표했다. 같은 날 레이건은 포인덱스터 안보보좌관의 사임을 수리하고 노스 중령을 해임했다. 노스는 서류 파쇄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사법방해 혐의의 출발점이 됐다. 전용이 사실이라면 의회의 콘트라 지원 금지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어서 사건의 성격이 외교 실책에서 위법 행위 의혹으로 바뀌었다. 12월 19일에는 로런스 월시가 독립검사로 임명돼 형사 수사가 본격화됐다.
타워위원회 보고서와 레이건의 대국민 인정 연설
1987년 2월 26일 존 타워 전 상원의원 등이 이끈 특별검토위원회(타워위원회)는 레이건의 방임적 관리 방식이 NSC의 월권을 불렀다고 비판하는 보고서를 냈다. 이어 3월 4일 레이건은 TV 연설에서 이란에 무기를 판 것이 인질과 맞바꾼 것이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는 마음과 의도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과 증거는 그렇지 않다는 취지로 말하며 책임을 졌다. 대통령이 직접 연루됐다는 증거는 이후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지율은 한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이 연설은 스캔들 대응에서 부분 시인을 택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노스·포인덱스터 의회 청문회 증언
1987년 5월부터 열린 상하원 합동 청문회에서 7월 초 올리버 노스가 사흘 이상 증언했고 이어 포인덱스터가 7월 중순 증언했다. 두 사람은 형사 면책을 전제로 증언했으며 노스는 해병 군복을 입고 나와 애국심을 강조하며 의회를 상대로 공세적 태도를 보였다. 포인덱스터는 대통령에게 전용 사실을 보고하지 않아 대통령이 부인할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방송으로 생중계된 증언에서 노스는 일부 국민에게 영웅으로 비쳤다. 그러나 면책 증언은 이후 형사 재판에서 증거 오염 문제로 이어져 처벌을 어렵게 만들었다.
노스 유죄 평결, 이후 항소심에서 파기
1989년 5월 4일 워싱턴 연방배심은 노스에 대해 불법 사례금 수수, 의회 방해 조력, 문서 파기 등 3개 혐의에 유죄를 평결했다. 같은 해 7월 법원은 징역을 유예하고 벌금과 사회봉사를 선고했다. 1990년 4월 포인덱스터도 5개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았다. 그러나 항소법원은 청문회 면책 증언이 재판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이유로 노스(1990년)와 포인덱스터(1991년)의 유죄 판결을 파기했고 노스에 대한 공소는 1991년 취하됐다. 결국 핵심 인물들은 실질적 처벌을 피했다.
조지 H.W. 부시, 와인버거 등 6명 사면
1992년 12월 24일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이란-콘트라 관련자 6명을 사면했다. 이 중에는 기소 후 재판을 앞둔 와인버거 전 국방장관과 이미 유죄를 인정한 맥파레인이 포함됐다. 월시 특검은 사면이 사건 은폐의 연장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는데, 부시 자신도 부통령 시절의 역할에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시 특검의 최종 보고서는 1994년 1월 공개돼 레이건이 불법 행위의 환경을 조성했다고 지적했고 14명이 기소돼 11명이 유죄를 받았다고 정리했다. 이 사건은 대통령 권한과 의회 감독의 경계를 다룬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이란-콘트라 사건, 레이건 행정부의 대이란 무기 밀매와 콘트라 자금 전용, 어떤 사건인가요?
- 1985~86년 레이건 행정부가 인질 석방을 노려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팔고 그 대금 일부를 의회가 금지한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 지원에 전용한 사실이 1986년 11월 폭로되면서 백악관 안보팀이 흔들리고 14명이 기소된 미국 정치 스캔들이다.
- 이란-콘트라 사건, 레이건 행정부의 대이란 무기 밀매와 콘트라 자금 전용, 언제 일어났나요?
- 1985-08부터 1994-01-18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이란-콘트라 사건, 레이건 행정부의 대이란 무기 밀매와 콘트라 자금 전용,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94-01-18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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