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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외교종결

대구 전쟁, 아이슬란드·영국의 어업 수역 분쟁과 NATO 위기(1958~1976)

1958-09-01 — 1976-06-01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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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58년부터 197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아이슬란드가 어업 수역을 12해리, 50해리, 200해리로 넓히자 영국이 해군을 투입해 어선을 호위하며 해상 충돌이 이어지고 외교 단절까지 간 NATO 회원국 간의 분쟁.

2. 전개 과정[편집]

11개 기록 · 1958-09-01 ~ 1976-06-01

19581건
  1. 아이슬란드, 어업 전관수역을 4해리에서 12해리로 확대

    1958년 9월 1일 아이슬란드는 어업 전관수역을 4해리에서 12해리로 일방적으로 확대했다. 경제를 어업에 크게 의존하던 아이슬란드는 자국 어장 보호를 명분으로 삼았다. 영국은 이 조치를 인정하지 않고 어선들을 계속 출어시켰으며 영국 해군 함정이 이를 호위했다. 이로써 이른바 '제1차 대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분쟁은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사이의 이례적인 군사적 대치로 전개되었다.

19611건
  1. 제1차 대구 전쟁 종결, 알싱기 비준

    1958년부터 이어진 아이슬란드 경비정과 영국 해군 간의 충돌은 NATO 중재로 협상 국면에 들어갔다. 1961년 2월 말 합의가 이뤄졌고 3월 11일 아이슬란드 의회가 이를 승인하며 1차 분쟁이 끝났다. 영국은 12해리 한도를 받아들이는 대신 일정 기간 제한적 조업 권리를 얻었다. 이 분쟁은 아이슬란드의 NATO 탈퇴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로 긴장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 합의는 이후 분쟁의 재발을 막지 못했다.

19722건
  1. 아이슬란드, 어업 수역을 50해리로 확대

    1972년 9월 1일 아이슬란드는 어업 전관수역을 50해리로 늘렸다. 어족 자원의 남획 우려와 어업 의존 경제가 배경이었다. 영국은 이를 거부했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한편 어선들은 계속 조업했다. 이로써 제2차 대구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이슬란드 해양경비대는 외국 어선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2. 해양경비대, 영국 트롤선 그물 절단기 첫 사용

    1972년 9월 5일 아이슬란드 해양경비대가 영국 트롤선의 어망 연결선을 끊는 절단기를 처음 사용했다. 이 방식은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어구를 손상시키는 방법으로, 이후 분쟁에서 주된 수단이 되었다. 1973년 1월에는 영국 트롤선 18척의 그물이 끊긴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 어민은 큰 손실을 입었고 영국 정부는 해군 호위를 강화했다. 이 전술은 이후 두 차례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733건
  1. 영국 해군 프리깃함 분쟁 수역에 투입

    1973년 5월 19일 영국 해군은 아이슬란드가 선포한 50해리 수역에 군함을 투입했다. 이는 어선 보호를 명분으로 한 조치였으며, 아이슬란드 해양경비정과 영국 군함 사이에 충돌과 접촉 사고가 잇따랐다. 영국은 제2차 분쟁 동안 프리깃함 수십 척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슬란드는 이에 맞서 NATO 기지 문제를 거론하며 외교적 압박을 높였다.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과 NATO 중재가 본격화되었다.

  2. 해양경비정 승무원 1명 감전 사망

    1973년 8월 29일 아이슬란드 해양경비정 에이르 호에서 승무원 할도르 할프레스손이 감전으로 사망했다. 이 사고는 영국 군함과의 충돌 후 수리 작업 중에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2차 대구 전쟁에서 확인된 유일한 사망자였다. 이 사건은 아이슬란드 국내 여론을 크게 자극했다. 정부는 영국에 대한 강경 대응 압박을 받았다.

  3. 영·아 임시 협정으로 제2차 대구 전쟁 종결

    1973년 11월 8일 양국은 협정에 서명해 제2차 대구 전쟁을 마무리했다. 협정은 영국 어선의 조업 구역과 연간 어획량을 제한하는 내용이었으며 기한은 2년이었다. 11월 13일 아이슬란드 의회가 이를 승인했다. 영국은 사실상 50해리 한도를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협정 만료가 다가오자 아이슬란드는 더 넓은 수역을 요구했다.

19752건
  1. 아이슬란드, 200해리 어업 수역 발효

    1975년 10월 15일 아이슬란드는 어업 전관수역을 200해리로 확대하는 조치를 발효했다. 이는 유엔 해양법 협상에서 거론되던 배타적 경제수역 흐름을 앞서 적용한 조치였다.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73년 임시 협정이 11월 13일 만료되자 영국 트롤선들은 조업을 이어갔다. 이로써 11월 중순부터 제3차 대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분쟁에서 양측은 세 차례 분쟁 중 가장 격렬한 충돌을 벌였고, 충돌 횟수는 수십 건에 이르렀다.

  2. 경비정 토르 호와 영국 지원선 충돌

    1975년 12월 11일 아이슬란드 경비정 토르 호와 영국 농수산식품부 소속 지원선 로이즈먼, 스타 아쿠아리우스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있었다. 항공기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제3차 분쟁의 상징적 장면이 되었다. 제3차 분쟁 동안 충돌 사례는 50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해군 프리깃함 수리 비용만 100만 파운드를 넘었다고 한다. 양측 모두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조심했지만 긴장은 극에 달했다.

19762건
  1. 아이슬란드, 영국과 외교 관계 단절

    1976년 2월 19일 아이슬란드는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다. 이는 NATO 회원국 간 첫 외교 단절 사례로 알려져 있다. 아이슬란드는 케플라비크 미군 기지 폐쇄 가능성도 시사했다. 냉전 상황에서 서방 동맹의 북대서양 방어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미국과 NATO는 중재 노력을 강화했다.

  2. 영국, 200해리 수역 수용 합의로 대구 전쟁 종결

    1976년 6월 1일 오슬로에서 영·아 간 합의가 이뤄졌다. 일부 자료에서는 6월 2일로 적고 있다. 영국은 아이슬란드의 200해리 어업 수역을 받아들이고 군함을 철수하며, 6개월간 제한적인 조업만 허용받았다. 이 합의로 영국 어선의 수 세기에 걸친 아이슬란드 근해 조업이 사실상 끝났고 영국 어촌 지역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이 국제 해양법상 일반 원칙으로 자리 잡는 데 영향을 주었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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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대구 전쟁, 아이슬란드·영국의 어업 수역 분쟁과 NATO 위기(1958~1976), 어떤 사건인가요?
1958년부터 197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아이슬란드가 어업 수역을 12해리, 50해리, 200해리로 넓히자 영국이 해군을 투입해 어선을 호위하며 해상 충돌이 이어지고 외교 단절까지 간 NATO 회원국 간의 분쟁.
대구 전쟁, 아이슬란드·영국의 어업 수역 분쟁과 NATO 위기(1958~1976), 언제 일어났나요?
1958-09-01부터 1976-06-01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대구 전쟁, 아이슬란드·영국의 어업 수역 분쟁과 NATO 위기(1958~1976),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76-06-01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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