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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외교종결

파쇼다 사건, 나일 상류에서 마주한 프랑스 마르샹 원정대와 영국 키치너 군의 대치

1898-07-10 — 1899-03-21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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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898년 7월 프랑스 마르샹의 원정대가 수단 나일강 상류의 파쇼다를 점령하고, 9월 오므두르만에서 승리한 영국 키치너 군이 도착해 양국이 전쟁 직전까지 간 식민지 대치로, 프랑스가 11월 철수하면서 1904년 영불협상의 길이 열렸다.

2. 전개 과정[편집]

8개 기록 · 1896 ~ 1904-04-08

18961건
  1. 프랑스, 장바티스트 마르샹 원정대를 콩고에서 나일로 파견

    프랑스 정부는 1896년 장바티스트 마르샹이 이끄는 소규모 원정대를 콩고 방면에서 나일강 상류로 파견해 영국의 남북 종단 정책에 맞설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원정대는 프랑스 장교 수 명과 세네갈 보병 약 백 명 안팎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다.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영국이 우위를 굳힌 데 대한 불만이 컸고 나일 상류를 확보하면 협상 카드가 된다고 보았다. 이 임무는 이후 2년 넘게 정글과 습지를 가로지르는 고된 행군으로 이어졌다.

18985건
  1. 마르샹 원정대,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 게양

    마르샹 원정대는 약 2년의 행군 끝에 1898년 7월 10일 나일강변 파쇼다(현재의 코도크)에 도착해 낡은 요새를 점령하고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그 무렵 수단은 마흐디 정권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영국과 이집트 군이 재정복 작전을 진행 중이었다. 마르샹은 현지 지배자와 조약을 맺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의 권리를 내세웠다. 이 도착은 영국이 구상하던 카이로-케이프 종단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2. 오므두르만 전투, 키치너의 영국-이집트군이 마흐디군 격파

    허버트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이집트 연합군은 1898년 9월 2일 오므두르만 전투에서 마흐디군을 격파하고 수단 재정복을 사실상 마무리했다. 이 승리로 키치너는 나일 상류 전체에 대한 영국과 이집트의 권리를 주장할 명분을 얻었다. 이어 그는 프랑스군이 파쇼다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현장으로 향했다. 승전의 기세를 탄 영국은 프랑스의 어떤 점유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3. 키치너가 파쇼다에서 마르샹과 대면, 양측 모두 철수 거부

    키치너는 증기선과 병력을 이끌고 1898년 9월 18일 파쇼다에 도착해 마르샹과 대면했다. 두 지휘관은 정중한 태도로 위스키와 샴페인을 나눴으나 각자 국기를 내리라는 요구에는 양보하지 않았다. 키치너는 영국과 이집트 국기를 근처에 게양하고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마르샹은 본국의 명령 없이는 떠날 수 없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개인적 충돌은 피했지만 결정은 런던과 파리 정부의 몫이 되었다.

  4. 영불 전쟁 위기 고조, 영국 함대 동원과 프랑스 내 정치 혼란

    런던과 파리 양쪽의 언론이 강경 논조를 쏟아내면서 영국은 해군을 동원해 전쟁에 대비했고 프랑스에서는 반영 감정이 거세졌다.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적 분열이 극심한 상황이어서 대외 충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새로 외무장관이 된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의 전면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협상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시기 영국 해군의 우위는 프랑스가 물러설 수밖에 없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5. 프랑스 정부, 마르샹 철수 결정

    프랑스 정부는 1898년 11월 3일 마르샹 원정대를 파쇼다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델카세 외무장관은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불리하다는 점과 국내 정치 불안을 고려해 양보를 택했다. 이 결정은 프랑스 민족주의 진영에서 굴욕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영국과의 전면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이후 12월 마르샹 원정대는 파쇼다를 떠나 지부티 방면으로 이동했다.

18991건
  1. 영불 협정, 나일-콩고 분수령을 세력권 경계로 확정

    1899년 3월 21일 영국과 프랑스는 협정을 맺어 나일강과 콩고강의 분수령을 양국 세력권의 경계로 삼기로 했다. 프랑스는 나일 유역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사하라 지역 등에서 영향권을 인정받았다. 수단은 영국-이집트 공동통치 체제로 편입되었고 파쇼다는 코도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합의로 양국은 아프리카 식민지 경쟁에서 직접 충돌할 위험을 줄였다.

19041건
  1. 영불협상 체결, 파쇼다 위기 이후의 관계 개선

    파쇼다 위기가 해소된 뒤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4월 8일 영불협상(앙탕트 코르디알)을 체결해 이집트와 모로코 등 식민지 문제를 일괄 정리했다. 협상은 두 나라가 수세기에 걸친 경쟁을 끝내고 독일의 부상에 대비하는 협력 관계로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파쇼다는 이후 양국 관계가 최악이던 순간의 상징으로 기억되었다. 이 사건은 제국주의 시대 열강이 무력 충돌 직전에서 협상으로 물러선 대표 사례로 언급된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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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파쇼다 사건, 나일 상류에서 마주한 프랑스 마르샹 원정대와 영국 키치너 군의 대치, 어떤 사건인가요?
1898년 7월 프랑스 마르샹의 원정대가 수단 나일강 상류의 파쇼다를 점령하고, 9월 오므두르만에서 승리한 영국 키치너 군이 도착해 양국이 전쟁 직전까지 간 식민지 대치로, 프랑스가 11월 철수하면서 1904년 영불협상의 길이 열렸다.
파쇼다 사건, 나일 상류에서 마주한 프랑스 마르샹 원정대와 영국 키치너 군의 대치, 언제 일어났나요?
1898-07-10부터 1899-03-21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파쇼다 사건, 나일 상류에서 마주한 프랑스 마르샹 원정대와 영국 키치너 군의 대치,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899-03-21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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