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코소보 공습 중 미군 폭격으로 기자 3명 사망(1999)
1999-05-07 — 1999-12-16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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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9년 5월 7일 NATO의 유고 공습 중 미군 B-2가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해 중국 기자 3명이 숨졌고, 미국은 낡은 지도에 따른 오폭이라며 사과했으나 중국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가 일어난 외교 사건이다.
2. 전개 과정[편집]
8개 기록 · 1999-03-24 ~ 2000
NATO, 코소보 사태를 이유로 유고연방 공습 개시
1999년 3월 24일 NATO는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탄압을 막겠다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안보리 승인 없이 이뤄진 군사작전이어서 중국과 러시아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공습은 수도 베오그라드의 정부 청사와 통신 시설 등 다양한 표적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은 이 작전이 주권 침해의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정치적 배경 때문에 훗날 대사관 폭격이 의도적이라는 의심이 쉽게 확산되었다.
미 B-2,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에 유도폭탄 5발 투하
1999년 5월 7일 밤 미국 B-2 스텔스 폭격기가 레이저·위성 유도폭탄 5발으로 베오그라드 신시가지의 중국대사관을 타격했다. 이 폭격으로 신화통신 기자 사오윈환과 쉬싱후, 광밍일보 기자 주잉 등 중국인 3명이 숨졌고 20여 명이 다쳤다. 대사관은 1996년 현재 위치로 이전한 상태였지만 표적 선정 과정에서 이를 반영하지 못했다. 폭격은 NATO 공습 중 가장 큰 외교적 파장을 낳은 오폭으로 기록된다. 중국은 즉각 국제 사회에 폭격 중단과 책임 규명을 요구했다.
미 국방·CIA '오류' 인정, 중국 각지서 반미 시위
5월 8일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조지 테닛 CIA 국장은 공동 성명으로 폭격이 오류였다며 유감을 표했다. CIA는 4년 전 지도와 부정확한 추정에 의존해 유고 군수 기관 건물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해명했다. 이날부터 베이징에서는 미국대사관 앞에 수만 명이 몰려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청두 주재 미 총영사 관저도 공격받았다. 중국 관영 매체는 고의 폭격 주장을 강하게 폈다. 미국 정부는 이를 오폭으로 설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클린턴, 장쩌민 주석에 직접 사과
1999년 5월 14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해 폭격에 대해 직접 사과했다. 클린턴은 사건 직후부터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했지만, 중국 지도부는 한동안 통화를 거부하며 압박했다. 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대사관을 노린 것이 아니며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와 조사 결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 통화는 위기 관리의 첫 고비였으나 갈등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피커링 차관, 베이징서 조사 결과 설명
6월 중순 토머스 피커링 국무차관이 베이징을 방문해 폭격 경위에 대한 미국 조사 결과를 중국에 설명했다. 미국은 잘못된 좌표와 오래된 지도, 표적 검증 체계의 허점이 겹쳤다고 밝혔다. 중국 측은 이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양국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보상과 책임 문제를 두고 협상을 이어 갔다. 사건은 이후 중국 내 민족주의 정서가 커지는 한 계기로 거론된다.
옵서버·덴마크 매체, 고의 폭격 의혹 보도
1999년 10월 영국 옵서버와 덴마크 매체는 공동 취재를 근거로 대사관이 NATO 적대 세력의 통신 중계소로 쓰여 의도적으로 폭격되었다는 주장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NATO 관계자 증언 등을 인용했다고 알려졌으나 미국은 이를 부인했다. 미국 정부는 CIA의 표적 선정 오류라는 기존 설명을 고수했다. 중국에서는 이 보도가 고의 폭격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널리 인용되었다. 진상을 둘러싼 논란은 이후에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중, 대사관 피해 2천8백만 달러 보상에 합의
1999년 12월 16일 미국과 중국은 미국이 대사관 시설 피해에 대한 보상금 2천8백만 달러를 의회에 요청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베이징 등지 미국 공관이 시위로 입은 피해를 보상하는 데 동의했다. 미국은 이미 사망자 유족과 부상자에게도 별도 보상을 지급한 바 있다. 이 합의로 외교적 갈등은 일단락되었지만 양국 불신은 남았다. 이는 오폭 사건이 금전 보상과 외교 문서로 정리된 과정이었다.
CIA, 표적 선정 담당자 일부 징계
사건 이후 CIA는 표적 선정 과정의 실수에 대해 내부 조사를 벌였고 일부 직원을 징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직원 1명이 해고되고 여러 명이 문책을 받았다. 정보기관은 현지 경험이 없는 팀이 오래된 지도에 의존한 점을 인정했다. 이후 표적 검증 절차를 보완하겠다는 개선책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 조치도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코소보 공습 중 미군 폭격으로 기자 3명 사망(1999), 어떤 사건인가요?
- 1999년 5월 7일 NATO의 유고 공습 중 미군 B-2가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해 중국 기자 3명이 숨졌고, 미국은 낡은 지도에 따른 오폭이라며 사과했으나 중국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가 일어난 외교 사건이다.
-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코소보 공습 중 미군 폭격으로 기자 3명 사망(1999), 언제 일어났나요?
- 1999-05-07부터 1999-12-16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코소보 공습 중 미군 폭격으로 기자 3명 사망(1999),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99-12-16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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