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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종결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참사

1970-04-08 — 197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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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한 동이 준공 넉 달 만에 무너져 33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친 사고로, 철근과 시멘트를 빼먹은 총체적 부실공사와 졸속 행정이 부른 참사이자 김현옥 서울시장 사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2. 전개 과정[편집]

8개 기록 · 1970-04-08 06:40 ~ 1970-04-08

  1. 준공 4개월 만에 와우아파트 한 동 붕괴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40분경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세워진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5층짜리 한 동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이 아파트는 1969년 6월 착공해 불과 6개월 만인 그해 12월 준공된 건물로, 완공된 지 겨우 넉 달 만에 붕괴한 것이다. 이른 아침 주민들이 잠들어 있던 시각에 건물이 순식간에 폭삭 주저앉으며 많은 이들이 잔해에 깔렸다. 도심 서민 주거지에서 벌어진 이 붕괴는 큰 충격을 안겼다. 부실공사의 실체가 참혹한 형태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2. 잔해가 아래 판잣집 덮쳐 추가 인명 피해

    무너진 아파트의 잔해는 아파트가 세워진 가파른 비탈 아래에 있던 판잣집들을 그대로 덮쳤다. 이로 인해 아파트 주민뿐 아니라 아래에서 살고 있던 주민까지 목숨을 잃었다. 붕괴의 충격은 건물 한 동에 그치지 않고 주변 저지대 서민들에게까지 미쳤다. 구조대와 주민들은 맨손으로 콘크리트 더미를 걷어내며 생존자를 찾았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부실하게 지어진 서민 아파트가 정작 서민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이었다.

  3. 사망 33명·부상 38명의 참사로 집계

    구조와 수습이 진행되면서 이 붕괴로 33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무너진 잔해에 깔린 아래 판잣집 주민까지 포함하면 희생자는 더 늘었다. 이른 아침 주거 중이던 주민들이 대피할 겨를도 없이 변을 당해 피해가 컸다. 삶의 터전이던 아파트가 순식간에 무덤으로 변한 것이다. 정부가 서민 주거 안정을 내세워 대대적으로 지은 시민아파트에서 벌어진 참사라 충격은 더욱 컸다. 부실공사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다.

  4. 철근·시멘트 빼먹은 총체적 부실공사 드러나

    조사 결과 와우아파트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부실하게 지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기둥 하나에 19mm 철근 70개가 들어가야 했지만 실제로는 5개 정도밖에 쓰이지 않았다. 시멘트는 넣는 시늉만 내어 콘크리트라기보다 모래와 자갈 반죽에 가까웠고, 반죽에 쓴 물조차 불순물이 많은 하수도 물이었다. 자재를 빼돌린 만큼 건물은 자기 무게조차 지탱하지 못했다. 부실 자재와 부실 시공이 겹친 필연적 붕괴였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5. 70도 경사에 부실 기초, 졸속 행정의 결과

    와우아파트는 70도에 이르는 가파른 산비탈에 세워졌음에도 앞쪽에 기둥 7개만 박아 기초로 삼는 등 지반과 구조에 대한 고려가 턱없이 부족했다. 무리한 입지에 부실한 기초가 더해진 것이다. 이 모든 부실은 6개월 만에 착공과 준공을 밀어붙인 졸속 행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실적을 앞세워 짧은 기간에 대량의 시민아파트를 지으려는 과정에서 안전이 뒷전으로 밀린 것이다. 속도 경쟁이 낳은 부실이 결국 대형 참사로 귀결됐다.

  6. 김현옥 서울시장 사퇴, 관련자 구속

    참사의 파장으로 사고 발생 일주일여 만인 4월 16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김현옥이 책임을 지고 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규모 시민아파트 건설을 밀어붙이던 서울시정의 상징적 인물이 낙마한 것이다. 부실공사와 자재 빼돌리기에 관여한 시공·감독 관계자들도 잇따라 구속돼 처벌을 받았다. 서울시의 시민아파트 건설 정책 전반이 재검토 대상에 올랐다. 참사는 행정 최고 책임자의 사퇴로까지 이어지며 부실공사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줬다.

  7. 시민아파트 정책 재검토와 안전 점검

    와우아파트 붕괴를 계기로 서울시가 대량으로 지어 오던 시민아파트 사업 전반에 대한 재검토와 안전 점검이 이뤄졌다. 급조된 다른 시민아파트들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부실이 확인된 건물에 대한 보강과 정비가 뒤따랐다. 서민 주거 공급을 명분으로 한 속도전이 안전을 담보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제기됐다. 이 사고는 저렴한 대량 공급과 안전한 건축이 양립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도시 개발기 부실 건축의 상징적 사례로 기록됐다.

  8. 부실공사의 상징으로 남은 와우아파트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는 한국 현대사에서 부실공사와 졸속 행정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남았다. 준공 넉 달 만에 무너진 아파트, 철근과 시멘트를 빼먹은 시공, 하수도 물로 반죽한 콘크리트라는 충격적 사실들은 오랫동안 안전 불감증의 경고로 인용됐다. 이 참사는 25년 뒤 삼풍백화점 붕괴 등 이후에도 반복된 대형 붕괴 사고와 함께, 성장 지상주의 시대 안전 경시의 위험성을 상기시켰다. 와우아파트라는 이름은 지금도 '부실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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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참사, 어떤 사건인가요?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한 동이 준공 넉 달 만에 무너져 33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친 사고로, 철근과 시멘트를 빼먹은 총체적 부실공사와 졸속 행정이 부른 참사이자 김현옥 서울시장 사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참사, 언제 일어났나요?
1970-04-08부터 1970-04-16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참사,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70-04-16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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