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리팩스 폭발 사고, 화약선 몽블랑호 충돌로 도시를 뒤흔든 캐나다 최악의 참사
1917-12-06 — 19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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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항에서 군수물자를 실은 프랑스 선박 몽블랑호가 노르웨이 선박 이모호와 충돌해 폭발, 약 1782명이 숨지고 9천 명이 다쳤다. 당시 세계 최대의 인공 폭발 중 하나로 꼽힌다.
2. 전개 과정[편집]
11개 기록 · 1917-12-05 ~ 1920-03-22
화약 운반선 몽블랑호와 이모호의 핼리팩스 입항
프랑스 화물선 몽블랑호는 뉴욕에서 TNT, 피크르산, 벤졸, 면화약 등 폭발성 화물을 싣고 12월 5일 핼리팩스에 도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핼리팩스는 연합군 호송 선단의 집결지로 선박 통행이 매우 붐볐다. 같은 날 노르웨이 구호선 이모호도 중립국 검사를 받기 위해 핼리팩스에 입항해 베드퍼드 분지에 이틀 머물렀다. 몽블랑호는 호송 선단에 합류하기 전 대기 중이었고 위험 화물 표시는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됐다. 두 배의 동선은 다음 날 아침 좁은 수로에서 겹쳤다.
오전 8시 45분 두 배의 충돌과 화재 발생
12월 6일 오전 7시 30분경 이모호는 항구를 떠나도록 허가받아 베드퍼드 분지를 출발했고 몽블랑호는 반대로 항구 안쪽으로 이동했다. 오전 8시 45분경 두 배는 좁은 수로에서 시속 1노트 정도의 느린 속도로 충돌했다. 이 충격으로 몽블랑호 갑판에 실린 벤졸 드럼이 파손되고 불꽃이 튀어 화재가 발생했다. 선원들은 폭발을 우려해 보트로 탈출했고 불타는 배는 해안 부두 쪽으로 떠내려갔다. 많은 시민이 불구경을 하러 창가와 부두로 몰려들었다.
오전 9시 4분 몽블랑호 대폭발
몽블랑호는 오전 9시 4분경 폭발해 TNT 약 2.9킬로톤에 해당하는 위력을 냈다. 폭풍파는 초속 1000미터 이상으로 퍼졌고 온도는 5000도에 이르렀으며 높이 약 3600미터의 버섯구름이 솟았다. 폭발과 해일, 건물 붕괴로 도시 북쪽 리치먼드 지구 일대가 초토화됐다. 핵무기 이전 시대에 가장 큰 인공 폭발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도시는 한순간에 거대한 폐허로 바뀌었다.
사망 1782명, 부상 9천 명, 주택 1630채 파괴
핼리팩스 폭발 추모록은 희생자 1782명을 확인했고 그중 약 1600명이 폭발과 해일, 붕괴로 즉사했다고 본다. 부상자는 약 9천 명이었으며 주택 1630채가 파괴되고 1만 2천 채가 손상됐다. 약 6천 명이 집을 잃었고 2만 5천 명은 제대로 된 거처가 없었다. 유리 파편에 시력을 잃은 사람이 많아 안과의사들은 249건의 안구 적출 수술을 했고 16명은 두 눈을 모두 잃었다. 피해액은 당시 약 3500만 캐나다달러로 추산됐다.
핼리팩스 구호위원회 설립과 구호 활동
폭발 당일 정오 무렵 매카럼 그랜트 부총독 주도로 핼리팩스 구호위원회가 구성돼 구호와 임시 거처 마련에 나섰다. 열차와 군 인력이 동원됐고 인근 지역과 미국 보스턴에서도 구호 물자와 의료진이 지원됐다. 12월 7일에는 임시 남쪽 터미널을 통해 열차 운행이 부분 재개됐고 9일에는 정상화됐다. 12월 11일에는 호송 선단이 출발하며 조선소 운영도 재개됐다. 이 위원회는 이후 1976년까지 생존자 연금 등을 관리했다.
난파 조사위원회 심문 시작
폭발 일주일 뒤인 12월 13일 핼리팩스 법원에서 아서 드리스데일 판사가 주재하는 난파 조사위원회 심문이 열렸다. 몽블랑호의 선장과 도선사, 이모호 관계자, 해군 관계자들이 증언했고 어느 쪽이 항로 규칙을 어겼는지가 핵심 쟁점이 되었다. 전쟁 중이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인 승무원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여론도 작지 않았다. 심문은 사고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형사 절차와 선주 간 민사 절차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항구 관리 체계의 허점도 드러났다.
조사위원회 보고서, 몽블랑호 측과 해군 검사관 책임 지목
조사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몽블랑호의 에메 르 메덱 선장, 프랜시스 매키 도선사, 해군 수석 검사관 F. 에반 와이어트 중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들은 과실치사와 형사상 과실 혐의로 기소됐다. 보고서는 이모호의 책임을 사실상 거론하지 않아 편파 논란이 있었다. 이모호의 선장과 수로 안내인이 폭발로 사망했기 때문에 해명할 기회가 제한됐다는 지적도 있었다. 형사와 민사 재판이 연달아 이어졌다.
형사재판 무산, 와이어트 무죄·매키 석방·르 메덱 기소 기각
4월 17일 배심은 하루가 채 안 걸린 재판 끝에 와이어트 중령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매키 도선사는 인신보호영장을 통해 석방됐고 르 메덱 선장에 대한 기소도 기각됐다. 결국 폭발과 관련해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생존자와 유족들은 참사의 책임자가 한 명도 처벌받지 않은 점에 분노했다. 이 결과는 책임 규명을 민사 절차에 맡기게 했다.
캐나다 해사법원, 몽블랑호에 전적인 책임 인정
핼리팩스 해사법원은 선주 간 민사 소송에서 몽블랑호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이모호 측의 항해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 선사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판단은 항소로 다시 다퉈졌다. 같은 사건에서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오며 선박 충돌 책임의 기준이 논쟁이 되었다. 항소 절차는 이후 캐나다 대법원과 영국 추밀원으로 넘어갔다.
캐나다 대법원, 두 선박 모두 항해 과실이 있다고 판단
캐나다 대법원은 두 선박이 항로 선택과 운항에서 서로 동일한 과실이 있었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책임이 양측에 균등하게 나뉘었다. 이 판결은 몽블랑호에만 책임을 물은 1심 판단을 뒤집는 것이었다. 같은 해 3월에는 폭발로 집을 잃은 시민을 위한 리치먼드 지구의 하이드로스톤 주택에 첫 입주가 시작됐다. 법적 판단과 재건 사업이 병행되었다.
영국 추밀원 사법위원회, 균등 책임 확정
영국 추밀원 사법위원회는 1920년 3월 22일 균등 책임 판단을 확정했다. 당시 캐나다의 최종심은 런던의 추밀원이었으며 이 판결로 민사 절차가 마무리됐다. 몽블랑호 측과 이모호 측은 모두 항해상 잘못이 있었다고 인정됐다. 그러나 사망자와 부상자, 이재민에 대한 실질적 보상은 정부와 구호위원회를 통한 연금 지급으로 이뤄졌다. 핼리팩스 폭발은 항만 안전과 위험물 운송 규정을 논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같이 보기[편집]
- 엑손 발데즈호 원유 유출, 알래스카를 덮친 당시 미국 최악의 유조선 사고— 사건·사고
- 런던 래드브록 그로브 열차 충돌 참사, 1999년 31명 사망과 적신호 무시·철도 안전 책임 논란— 사건·사고
- 맨섬 서머랜드 레저센터 화재 참사, 1973년 50명 사망과 가연성 아크릴 외장재 논란— 사건·사고
- 힌덴부르크호 비행선 화재 참사, 레이크허스트에서 36명 사망— 사건·사고
-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 승조원 118명 전원 사망과 늑장 대응 파문— 사건·사고
- 독일 에셰데 ICE 고속열차 탈선 참사, 바퀴 금속 피로가 부른 101명 사망— 사건·사고

자주 묻는 질문
- 핼리팩스 폭발 사고, 화약선 몽블랑호 충돌로 도시를 뒤흔든 캐나다 최악의 참사, 어떤 사건인가요?
-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항에서 군수물자를 실은 프랑스 선박 몽블랑호가 노르웨이 선박 이모호와 충돌해 폭발, 약 1782명이 숨지고 9천 명이 다쳤다. 당시 세계 최대의 인공 폭발 중 하나로 꼽힌다.
- 핼리팩스 폭발 사고, 화약선 몽블랑호 충돌로 도시를 뒤흔든 캐나다 최악의 참사, 언제 일어났나요?
- 1917-12-06부터 1920-03-22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핼리팩스 폭발 사고, 화약선 몽블랑호 충돌로 도시를 뒤흔든 캐나다 최악의 참사,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20-03-22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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