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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 형제 실버 써스데이, 1980년 은 매점 시도와 은값 폭락

1974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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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9년 말 은 선물 시장에서 헌트 형제가 약 1억 9500만 온스를 지배하며 가격이 10달러 미만에서 50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가, 1980년 3월 27일 10.80달러로 붕괴해 브로커와 은행이 위기에 빠지고 11억 달러 구제 대출과 조작 소송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2. 전개 과정[편집]

11개 기록 · 1974 ~ 1989

19741건
  1. 형제의 은 매집 시작, 1974년 초 약 5000만 온스 보유

    석유 재벌 H. L. 헌트의 아들인 넬슨 벙커 헌트와 윌리엄 허버트 헌트는 1970년대 초부터 은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훗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보고서에 따르면 벙커 헌트는 1973년 말 약 2000만 트로이온스를 매입했고, 두 형제는 1974년 초까지 합쳐 약 5000만 온스를 모았다. 이는 인플레이션과 달러 약세에 대비한 실물자산 투자로 시작됐지만, 이후 규모가 커지며 시장 구조를 흔드는 포지션이 됐다. 이 초기 매집은 1979년의 대규모 확대의 출발점이었다.

19792건
  1. 1979년 하반기 포지션 급팽창, 1억 2300만에서 1억 9500만 온스로

    헌트 형제는 1979년에 포지션을 크게 늘렸다. 1979년 7월 31일부터 1980년 1월 1일 사이 벙커 헌트, 허버트 헌트, 그리고 헌트 계열의 국제금속투자회사(IMIC)가 지배한 은은 약 1억 2300만 온스에서 약 1억 9500만 온스로 늘었다. 같은 기간 은 가격은 온스당 약 9달러에서 약 35달러로 뛰어 포지션의 평가액이 약 11억 달러에서 68억 달러로 불어났다. 포지션의 절반가량은 현물이 아닌 은 선물이었고, 이는 가격 하락 시 막대한 증거금 추가 요구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위험이었다.

  2. 1979년 12월 31일 은값 34.45달러, 1980년 1월 50달러 돌파

    1979년 8월 이전 온스당 10달러 아래에서 거래되던 은은 1979년 12월 31일 34.45달러에 이르렀고 1980년 1월에는 50달러를 넘어섰다. 은을 쓰는 산업체와 보석상들은 가격 급등에 반발했다. 선물 가격이 현물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한편, 헌트 계열 계정을 맡은 선물중개회사는 거래소에 대해 이행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 비정상적 상승은 거래소와 규제 당국이 개입하는 계기가 됐다.

19805건
  1. 코멕스 포지션 한도 도입, 1월 21일 청산 전용 거래 조치

    1980년 1월 7일 코멕스(COMEX)는 은 선물에 포지션 한도를 부과했다. 1월 21일에는 은 선물 거래를 청산 주문과 실수요 헤지 거래로만 제한했고, 시카고상품거래소(CBOT)도 비슷한 제한을 채택했다. 코멕스 이사회는 가격 상승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특별·긴급 회의를 열었고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도 거래소와 계속 접촉했다. 이 조치들은 신규 매수를 막아 가격 상승 동력을 꺾는 효과를 냈다.

  2. 1월 22일 하루 약 10달러 급락, 이후 2월~3월 초 31~38.5달러 박스권

    거래 제한과 동시에 가격 흐름이 뒤집혔다. 1월 22일 은 현물가격은 하루 만에 약 10달러 떨어져 온스당 34달러가 되었다. 이후 3월 초까지 약 31달러에서 38.5달러 사이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3월 10일 29.75달러에서 다시 하락이 가속돼 3월 27일 10.80달러까지 떨어졌다. 하락 국면에서 헌트 계열 계정은 변동증거금 대량 납부를 요구받았고, 현물 인수 약속에 따른 지급 의무도 있었다.

  3. 3월 25~26일 허버트 헌트의 증거금 불이행 통보와 티파니 광고

    1980년 3월 25일과 26일 허버트 헌트는 주요 채권자와 브로커에게 헌트 측이 증거금 요구를 충족할 현금이나 담보가 부족하다고 알렸다. 바슈 핼시 스튜어트 쉴즈(훗날 프루덴셜 증권에 편입)는 헌트로부터 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청산기관에 증거금을 계속 납부했다. 3월 26일에는 티파니가 뉴욕타임스에 '터무니없다(Unconscionable)'는 제목의 광고를 내 수십억 달러어치 은 사재기와 소비자 피해를 비판했다. 시장 신뢰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4. 실버 써스데이, 은값 10.80달러 마감과 바슈 주식 거래 정지

    1980년 3월 27일 목요일 은 가격은 급락해 온스당 10.80달러로 마감했다. 바슈는 헌트 계열의 은 선물 포지션을 청산했고, 이날 시세 기준 헌트 계정의 무담보 차변 잔액은 약 1억 2200만 달러로 바슈의 순자산을 크게 훼손할 수준이었다. SEC는 은값 폭락과 헌트 계정 증거금 요구 때문에 같은 날 바슈 보통주 거래를 정지했고 거래는 4월 1일 재개됐다. SEC 직원은 이후 헌트 관련 익스포저가 있는 증권사와 은행이 큰 손실을 볼 수 있어 더 넓은 혼란이 우려됐다고 결론지었다.

  5. 13개 은행 컨소시엄의 11억 달러 대출 구제

    붕괴 이후 13개 은행 컨소시엄은 헌트 일가 소유의 플라시드 오일에 11억 달러 대출을 주선했다. 이 대출은 석유·가스 자산, 정유시설, 파이프라인을 담보로 했고 벙커·허버트·라마 헌트가 보증했다. 대출금은 브로커와 대주단에 대한 의무를 갚는 데 쓰여 즉각적인 연쇄 파산 위험을 줄였다. 헌트 측은 엥겔하드에 대한 큰 채무도 석유 탐사 자산 이전과 은 담보 유지 허용으로 정리했다. 구제는 시장 붕괴를 막았지만 헌트 가문의 재무 부담은 이후 오래 남았다.

19882건
  1. 1988년 미넥포 민사소송 배심 평결, 은 시장 매점 공모 인정

    1988년 연방 배심은 페루 광물 판매 기관 미넥포가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벙커 헌트, 허버트 헌트, 라마 헌트 등 피고들이 은 시장을 매점하려 공모했다고 판단했다. 3배 배상과 이전 합의금 상계를 거친 판결액은 1억 3400만 달러로 보도됐다. 이 판결은 이미 압박받던 헌트 형제의 재무에 추가 부담을 줬다. 사건 8년 만에 시장 조작 책임이 법적으로 인정된 셈이었다.

  2. 벙커·허버트 헌트 연방파산법 11조 신청

    1988년 9월 벙커 헌트와 허버트 헌트는 연방파산법 11조에 따른 보호를 신청했다. 이는 당시 텍사스 개인 파산 신청 중 가장 큰 축에 속했다. 미넥포 판결과 은 사건의 후폭풍이 직접적 계기로 작용했다. 한때 수십억 달러의 은 포지션을 가졌던 형제가 파산 보호를 구하게 된 결말이었다.

19891건
  1. CFTC 제재 합의, 벌금과 상품거래 금지

    1989년 벙커 헌트와 허버트 헌트는 CFTC가 제기한 시장 조작 혐의에 대해 합의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은 벌금을 내고 상품거래를 금지당했다. SEC와 CFTC는 은 위기 사건을 조사했고 CFTC는 헌트 일가를 상대로 시장 조작 절차를 진행했다. 이 사건은 선물시장의 포지션 한도와 증거금 규제 필요성을 보여준 사례로 거론됐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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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헌트 형제 실버 써스데이, 1980년 은 매점 시도와 은값 폭락, 어떤 사건인가요?
1979년 말 은 선물 시장에서 헌트 형제가 약 1억 9500만 온스를 지배하며 가격이 10달러 미만에서 50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가, 1980년 3월 27일 10.80달러로 붕괴해 브로커와 은행이 위기에 빠지고 11억 달러 구제 대출과 조작 소송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헌트 형제 실버 써스데이, 1980년 은 매점 시도와 은값 폭락, 언제 일어났나요?
1974부터 1989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헌트 형제 실버 써스데이, 1980년 은 매점 시도와 은값 폭락,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89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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