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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아버클 버지니아 래프 사망 스캔들, 세 차례 재판과 할리우드 도덕 검열 체제(1921~1922)

1921-09-05 — 193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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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2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호텔 파티에서 배우 버지니아 래프가 숨지자 무성영화 스타 로스코 '패티' 아버클이 강간·살인 혐의로 기소돼 세 차례 재판을 받고 1922년 무죄를 받았지만, 언론 선정주의와 경력 파탄이 할리우드 자율 검열 기구 설립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2. 전개 과정[편집]

7개 기록 · 1921-09-05 ~ 1933-06-29

19213건
  1. 샌프란시스코 세인트프랜시스 호텔 파티

    1921년 9월 5일 노동절 연휴에 무성영화 코미디 스타 로스코 '패티' 아버클은 샌프란시스코 세인트프랜시스 호텔 스위트룸에서 파티를 열었다. 당시 그는 파라마운트와 거액 계약을 맺은 미국 최고 인기 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다. 파티에는 영화계 인사와 지인들이 참석했고 술이 오갔으며 배우 지망생 버지니아 래프도 있었다. 파티 도중 래프가 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두고 이후 엇갈린 주장이 나왔다. 이 하루의 사건이 할리우드 첫 대형 스캔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2. 래프 사망과 아버클 체포·기소

    버지니아 래프는 파티 나흘 뒤인 9월 9일 병원에서 복막염으로 숨졌고, 사인은 방광 파열에 따른 것이었다. 함께 있던 모드 델몬트는 아버클이 래프를 성폭행해 숨지게 했다고 주장했고,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 매슈 브레이디는 아버클을 체포해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허스트 계열 신문을 비롯한 언론은 선정적 보도를 쏟아냈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사실처럼 퍼졌다. 아버클의 영화는 극장에서 철거되고 여러 지역에서 상영이 중단되었다. 이후 혐의는 과실치사로 조정되었으나 여론은 이미 그에게 불리하게 기울어 있었다.

  3. 1차 재판, 배심 평결 불발

    1921년 11월 열린 첫 재판에서 검찰은 아버클이 래프를 폭행해 숨지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핵심 증인이어야 할 델몬트는 증언대에 서지 않았고, 일부 증인의 진술 신빙성도 도마에 올랐다. 방어 측은 래프의 질환이 이전부터 있었고 아버클에게 직접 원인이 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맞섰다. 배심은 평결에 이르지 못해 재판은 무효가 되었다. 언론은 이 결과에도 아버클을 비난하는 보도를 이어갔다.

19223건
  1. 2차 재판도 평결 불발

    1922년 1월 열린 두 번째 재판에서도 배심원단은 일치된 평결을 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방어 측이 증인 신빙성과 검찰 증거의 약점을 더 적극적으로 부각했다. 소송비용과 거액의 변호 비용으로 아버클은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영화 계약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파라마운트를 비롯한 스튜디오는 여론 악화를 우려해 그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두 번의 평결 불발은 검찰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는 평가도 나왔다.

  2. 3차 재판 무죄 평결과 배심의 공개 사과

    세 번째 재판은 1922년 3월에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아버클이 직접 증언대에 올랐다. 배심원단은 약 5분의 짧은 숙의 끝에 4월 12일 무죄 평결을 내렸다. 배심은 평결문에서 '무죄 선고만으로는 아버클에게 충분하지 않다. 그에게 큰 부당함이 가해졌다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사과문까지 냈다. 그러나 이미 영화계 이미지는 회복 불능 수준으로 무너져 있었다. 법적으로는 결백이 인정되었지만 대중 여론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3. 윌 헤이스의 영화계 퇴출 조치

    무죄 평결에도 불구하고 신설된 영화제작배급협회(MPPDA)의 초대 회장 윌 H. 헤이스는 1922년 4월 아버클 출연작의 상영 금지를 발표했다. 영화계는 잇따른 스캔들로 교회와 시민단체의 검열 압박을 받고 있었고, 업계는 스스로 도덕 기준을 세워 정부 규제를 피하려 했다. 헤이스 체제는 이후 제작 규약(이른바 헤이스 코드)으로 발전해 수십 년간 할리우드를 통제했다. 아버클은 이 새로운 자율 검열 체제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같은 해 말 금지는 해제되었으나 복귀는 쉽지 않았다.

19331건
  1. 아버클 사망

    아버클은 이후 가명 윌리엄 B. 구드리치로 감독 일을 이어갔고 1933년 워너브라더스와 단편 계약을 맺으며 재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1933년 6월 29일 뉴욕에서 46세의 나이로 숨졌다. 법적으로는 무죄였지만 생전에 이미지가 회복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이후 할리우드가 스캔들과 도덕 검열을 다루는 방식의 원형이 되었다. 현대에는 언론의 선정주의와 여론재판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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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패티 아버클 버지니아 래프 사망 스캔들, 세 차례 재판과 할리우드 도덕 검열 체제(1921~1922), 어떤 사건인가요?
192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호텔 파티에서 배우 버지니아 래프가 숨지자 무성영화 스타 로스코 '패티' 아버클이 강간·살인 혐의로 기소돼 세 차례 재판을 받고 1922년 무죄를 받았지만, 언론 선정주의와 경력 파탄이 할리우드 자율 검열 기구 설립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패티 아버클 버지니아 래프 사망 스캔들, 세 차례 재판과 할리우드 도덕 검열 체제(1921~1922), 언제 일어났나요?
1921-09-05부터 1933-06-29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패티 아버클 버지니아 래프 사망 스캔들, 세 차례 재판과 할리우드 도덕 검열 체제(1921~1922),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33-06-29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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