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 (1968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1968-01-16 — 1968-01-31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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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8년 1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다가 자하문 앞 총격전 끝에 저지된 사건으로, 생포된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리며 향토예비군 창설 등 안보체제 강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2. 전개 과정[편집]
10개 기록 · 1968-01-16 ~ 2018-01-21
124군부대 침투조 남파
1968년 1월 16일 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황해북도 연산의 제6기지를 출발했다. 이들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기관단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채 박정희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해 요인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대원들은 오랜 기간 청와대 모형을 놓고 침투와 살해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 요원이었다. 김일성의 대남 강경 노선과 무력 통일 시도가 배경에 깔려 있었다. 이 남파는 이후 열흘간 이어진 1·21 사태의 시작이었다.
휴전선 돌파와 서울 방면 침투
무장공비들은 1월 17일 밤 군사분계선(휴전선)을 넘어 경기도 파주 방향으로 침투를 시작했다. 이들은 야간에는 이동하고 주간에는 은거하는 방식으로 법원리 뒷산과 노고산, 북한산 능선을 타고 서울로 접근했다. 당시 전방 철책 경계망을 뚫고 수도 서울 한복판까지 무장 병력이 진입한 것은 휴전 이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원들은 민가와 경계 초소를 우회하며 은밀히 남하했다. 침투 사실은 이 시점까지 국군과 경찰에 포착되지 않았다.
나무꾼 우씨 형제와 조우
1월 19일 파주 삼봉산 일대에서 침투조는 나무를 하러 온 우성제 등 민간인 형제와 마주쳤다. 대원들은 이들을 사살할지 논의했으나 사상 교육을 한 뒤 신고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풀어줬다. 그러나 풀려난 형제는 곧바로 경찰에 이 사실을 신고했다. 이 신고가 군경이 무장공비의 존재를 처음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 이미 침투조는 서울 시내 가까이 진입한 상태였다.
군경 비상경계 발령
나무꾼 형제의 신고로 군과 경찰은 뒤늦게 무장공비 침투 사실을 파악하고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침투조가 국군 방첩대 복장으로 위장하고 부대 이동을 가장했기 때문에 검문검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대원들은 세검정 방향으로 계속 이동해 청와대에 근접했다. 서울 도심의 경계망이 이들의 대담한 위장 앞에 뚫린 상황이었다. 결국 청와대 인근에서야 결정적 검문이 이뤄지게 된다.
자하문 앞 총격전과 최규식 총경 순직
1월 21일 밤 9시 30분경 무장공비들은 청와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종로구 세검정·자하문(창의문) 부근까지 진출했다. 수상한 병력을 발견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불심검문에 나서자 공비들이 총격과 수류탄으로 응수하며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규식 총경과 정종수 경사가 순직했고, 지나가던 시내버스에 수류탄이 터져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공비들은 검문을 뚫지 못하자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청와대 습격 기도는 이 지점에서 사실상 저지됐다.
김신조 생포와 기자회견
교전 다음 날 유일하게 생포된 침투조원 김신조가 기자회견에 나섰다. 그는 침투 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답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김신조의 진술로 북한 124군부대의 존재와 청와대 습격 계획의 전모가 드러났다. 그는 이후 전향해 대한민국에 정착했고 훗날 목사가 됐다. 이 회견은 북한의 무력 도발 실상을 국민에게 각인시킨 장면으로 남았다.
소탕작전 종료 — 29명 사살
군경은 1월 21일부터 1월 31일까지 서울 근교 산악에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침투조 31명 가운데 29명이 사살되고 1명(김신조)이 생포됐으며 1명은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파악됐다. 소탕 과정에서 군경과 민간인을 포함해 30여 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다치는 등 인명 피해가 컸다. 수도권 한복판에서 벌어진 열흘간의 추격전이 마무리된 것이다. 이 사건은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북한 무장 침투로 기록됐다.
이틀 뒤 푸에블로호 나포로 위기 증폭
1·21 사태 이틀 뒤인 1월 23일 북한은 동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승조원 82명을 억류했다. 청와대 습격 기도와 미군함 나포가 연이어 터지면서 한반도 긴장은 전쟁 위기 수준으로 치솟았다. 미국은 항공모함을 동해로 급파했고 한국 정부는 강력한 보복을 주장했다. 두 사건은 1968년 초 한반도 안보 위기를 상징하는 연쇄 도발로 묶여 다뤄진다. 이는 한미 간 대북 대응을 둘러싼 이견도 드러냈다.
향토예비군 창설 등 안보체제 강화
1·21 사태의 충격은 대한민국의 안보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이어 주민등록증 제도 정비, 고등학교·대학교 교련 교육 도입, 국민교육헌장 제정 등이 잇따랐다. 북한 특수부대에 대응하기 위한 실미도 684부대 등 대북 침투부대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대간첩 작전 체계와 예비 전력 동원 제도가 이때 확립됐다. 하나의 사건이 국가의 병역·치안 제도 전반을 재편한 셈이다.
50주년 — 순직 경찰 추모와 역사적 평가
사건 발생 5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 자하문 고개의 최규식 경무관 동상 앞에서 추모식이 열리는 등 1·21 사태는 매년 기념·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과 전향 과정을 증언해 왔다. 이 사건은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이 실제 최고 지도자 암살 기도로까지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동시에 향토예비군 창설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안보 제도의 기원으로 기억된다. 반세기가 지나서도 남북 관계와 안보를 성찰하는 계기로 소환된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1·21 사태 (1968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어떤 사건인가요?
- 1968년 1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다가 자하문 앞 총격전 끝에 저지된 사건으로, 생포된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리며 향토예비군 창설 등 안보체제 강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 1·21 사태 (1968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언제 일어났나요?
- 1968-01-16부터 1968-01-31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1·21 사태 (1968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68-01-31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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