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비스키 사건, 사기꾼의 의문사와 쇼탕 내각 붕괴·2월 6일 파리 폭동
1933-12 —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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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33년 말 바욘 시립 전당포 채권 사기로 도주하던 금융업자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가 1934년 1월 의문의 죽음을 맞으며 정·관계 유착 의혹이 폭발해 쇼탕 총리가 사임하고 2월 6일 파리 폭동으로 17명이 숨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 스캔들.
2. 전개 과정[편집]
9개 기록 · 1927 ~ 1936
스타비스키의 첫 사기 재판이 거듭 연기됨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는 1926년 무렵 각종 금융 사기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1927년 재판은 보석과 연기가 반복되면서 사실상 열리지 않았다. 자료에 따라 재판이 십수 차례 미뤄졌다고 전해지며, 이 지연에는 정·관계 인맥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훗날 제기되었다. 당시 검찰 고위직이 급진당 소속 정치인 카미유 쇼탕과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도 나중에 언론이 문제 삼았다. 이 시기에 스타비스키는 처벌을 피한 채 새로운 투자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사법 독립성에 대한 불신을 키운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바욘 시립 전당포 채권 사기 드러남, 스타비스키 도주
스타비스키는 프랑스 남서부 바욘 시의 시립 전당포(크레디 뮈니시팔)가 발행한 채권을 이용해 대규모 자금을 끌어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담보로 제시된 보석이 가짜였다는 사실이 1933년 12월 불거지면서 채권 사기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해 규모는 자료에 따라 수천만 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스타비스키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프랑스를 벗어나 도피에 나섰다. 이 폭로는 사기꾼 한 명의 범죄가 정치권 인사들과의 유착 의혹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샤모니 별장에서 스타비스키 총상 사망, 공식 자살 발표
1934년 1월 8일 경찰이 알프스 샤모니의 별장에서 총상을 입은 스타비스키를 발견했고 그는 곧 숨졌다. 당국은 경찰이 들이닥치는 순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입막음을 위해 제거됐다는 소문이 우파 언론을 중심으로 퍼졌다. 풍자 신문 르 카나르 앙셰네는 그가 '근거리에서 발사된 권총 한 발로 자살했다'고 비꼬았다. 이 석연찮은 죽음으로 사건은 단순 금융 범죄에서 정권 은폐 의혹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쇼탕 총리 사임
스타비스키 사망 이후 야당 언론은 정부가 증인을 없앴다고 공세를 이어갔다. 급진당 정부의 각료 여러 명이 스타비스키와 연루된 것으로 거론되었고, 그의 재판이 장기간 연기된 데에 총리의 처남인 검사가 관련돼 있다는 사실도 보도되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카미유 쇼탕 총리는 1934년 1월 27일 사임했다. 이는 제3공화국의 정치 부패에 대한 불신이 정권 붕괴로 이어진 사례였다. 사임 후에도 의혹은 가라앉지 않고 거리 시위로 번졌다.
달라디에 내각 출범과 파리 경찰청장 시아프 경질 파장
쇼탕의 후임으로 급진당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1월 30일 새 내각을 구성했다. 달라디에는 우파 단체들과 가깝다고 알려진 파리 경찰청장 장 시아프를 경질했고, 이 조치가 우파 진영의 반발을 불러 대규모 집회 예고로 이어졌다. 경찰청장의 해임은 군주제·파시즘 성향 연맹들이 정부를 공격하는 구실이 되었다. 의회에서는 스타비스키 사건 조사위원회 구성 논의도 이어졌다. 이렇게 금융 스캔들은 좌우 정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2월 6일 파리 콩코르드 광장 폭동, 시위대 17명 사망
1934년 2월 6일 밤 우파 연맹과 퇴역군인 단체 등이 의회 건물 맞은편 콩코르드 광장으로 몰려가 정부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가 폭력으로 번지면서 경찰이 발포했고 시위대 17명이 숨졌으며 다수가 부상했다. 이 사건은 제3공화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거리 위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좌파는 이를 파시스트 쿠데타 시도로 받아들여 연대 움직임을 강화했다. 후일 인민전선 결성의 배경으로 자주 거론된다.
달라디에 총리 사임
폭동 이튿날인 2월 7일 달라디에 총리는 의회 신임을 확보했음에도 거리 압력과 연립 내 균열 속에 사임했다. 취임 일주일여 만의 퇴진으로, 거리 폭력이 내각을 무너뜨렸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후 전직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가 이끄는 거국 내각이 들어섰다. 이 일련의 과정은 의회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좌파 진영은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을 굳혔다.
사건 수사 판사 알베르 프랭스 시신 발견
스타비스키 사건 관련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 소속 알베르 프랭스가 1934년 2월 20일 디종 인근 철로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 또는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입막음 살해설이 널리 퍼졌다. 이 죽음은 스타비스키의 죽음과 함께 은폐 의혹을 증폭시킨 또 하나의 석연찮은 사건이었다. 의회 조사위원회는 정치권과 사법부의 유착 정황을 추궁했다. 사건의 진상은 현재까지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스타비스키 사건 연루자 재판, 피고인 전원 무죄
1935년부터 스타비스키와 관련된 20여 명이 기소되어 방대한 공소장 아래 재판을 받았다. 1936년 재판부는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이는 여론의 분노를 다시 자극했다. 같은 해 총선에서는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승리해 정권을 잡았다. 이 사건은 정치 부패와 사법 불신이 어떻게 극우 거리 정치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 남았다. 약 1800만 달러에 이르는 사기 규모와 별개로 정치적 파장이 더 컸던 스캔들이었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스타비스키 사건, 사기꾼의 의문사와 쇼탕 내각 붕괴·2월 6일 파리 폭동, 어떤 사건인가요?
- 1933년 말 바욘 시립 전당포 채권 사기로 도주하던 금융업자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가 1934년 1월 의문의 죽음을 맞으며 정·관계 유착 의혹이 폭발해 쇼탕 총리가 사임하고 2월 6일 파리 폭동으로 17명이 숨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 스캔들.
- 스타비스키 사건, 사기꾼의 의문사와 쇼탕 내각 붕괴·2월 6일 파리 폭동, 언제 일어났나요?
- 1933-12부터 1936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스타비스키 사건, 사기꾼의 의문사와 쇼탕 내각 붕괴·2월 6일 파리 폭동,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36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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