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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종결

웨일스 애버펀 석탄 폐석 더미 붕괴 참사

1958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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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6년 10월 21일 웨일스 머서 베일 탄광의 폐석 더미가 폭우 뒤 무너져 내려 애버펀 마을 초등학교를 덮쳤고 어린이 116명을 포함해 144명이 숨졌다. 국립석탄위원회의 안전 방치와 은폐적 대응이 조사 법정에서 드러나 영국 산업 안전과 규제 책임 논쟁의 상징이 됐다.

2. 전개 과정[편집]

9개 기록 · 1958 ~ 1973

19581건
  1. 마을 위 불안정한 지반에 7번 폐석 더미 적치 시작

    머서 베일 탄광은 1869년부터 채굴을 시작했고 폐석은 마을 위 산비탈에 쌓여 왔다. 1958년부터는 7번 폐석 더미가 애버펀 마을과 초등학교 바로 위 불안정한 지반에서 쌓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지도에도 표시된 샘과 물길이 있어 폐석이 물에 젖기 쉬웠다. 같은 단지의 다른 더미는 이미 1944년과 1963년에 미끄러진 전례가 있었다. 그럼에도 석탄위원회에는 폐석 적치 정책이 없었고 인근 주민들의 우려도 사실상 방치됐다.

19665건
  1. 폭우 뒤 7번 더미 붕괴, 판트글라스 초등학교 덮쳐

    1966년 10월 21일 오전 9시 15분경 이미 높이 약 111피트까지 쌓인 7번 폐석 더미가 연일 내린 비로 물을 머금은 채 무너져 내렸다. 진흙과 폐석은 산비탈을 따라 마을로 쏟아졌고 생존자들은 낮게 나는 제트기나 내달리는 전차 같은 굉음이 들렸다고 증언했다. 폐석 더미는 판트글라스 초등학교와 인근 주택들을 덮쳤고 하교 전 마지막 수업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 사고로 144명이 숨졌고 그중 116명이 7~11세의 어린이였다. 희생자는 생후 3개월에서 82세에 이르렀다.

  2. 주민·광부 맨손 구조와 베사니아 예배당 임시 영안실

    사고 직후 현장에는 인근 광부와 주민들이 달려가 맨손과 삽으로 진흙 속의 아이들을 파냈다. 구조는 몇 시간 만에 사실상 생존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으로 바뀌었고 오후에는 시신 수습이 중심이 됐다. 마을의 베사니아 예배당이 임시 영안실로 쓰였고 인근 가게가 사망 확인서 업무를 보조하는 등 마을 전체가 사고 수습의 장이 됐다. 부모들은 학교 앞에서 자녀의 소식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웠다. 대규모 사상자는 지역사회에 장기적인 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3. 웨일스 담당 장관, 조사 법정 설치

    참사 직후 웨일스 담당 장관은 사고의 원인과 경위를 조사할 공식 조사 법정을 설치했다. 법정은 에드먼드 데이비스 판사가 의장을 맡았고 정부의 공식 조사 틀을 따랐다. 설치는 참사 발생 닷새 만에 이뤄졌고 의회에서는 책임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조사는 석탄위원회의 폐석 더미 관리, 사전 경고와 대응, 안전 규정을 두루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이 조사 법정은 이후 영국 산업재해 조사의 대표 사례로 남았다.

  4.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참사 8일 만에 현장 방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0월 29일 에든버러 공과 함께 애버펀을 찾아 희생자를 애도했다. 여왕은 사고 후 8일 만에 방문했고 이후 이를 평생의 가장 큰 후회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고 전해진다. 현장에서는 주민들이 여왕을 맞았고 일부 주민은 즉각적인 방문이 늦었다고 아쉬워했다. 여왕은 이후에도 1973년과 1997년, 2012년에 다시 애버펀을 찾았다. 방문은 왕실이 대형 재난 앞에서 취할 태도의 기준을 둘러싼 논쟁에도 영향을 줬다.

  5. 조사 법정 공개 심리 시작, 76일간 증언 청취

    조사 법정은 11월 2일 공개 심리를 시작해 모두 76일 동안 증인들의 증언을 들었다. 법정은 석탄위원회가 폐석 더미 안전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갖고 있었는지, 이전 슬라이드 경고가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집중 조사했다. 심리 과정에서 위원회가 법적 책임을 사적으로 이미 인정하고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심리 시간을 낭비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법정은 이런 태도를 감탄스러울 만큼 뻔뻔하다는 취지로 표현했다. 광범위한 문서와 기상 자료, 현장 기록이 증거로 제출됐다.

19671건
  1. 조사 보고서 발표, 석탄위원회에 전적인 책임

    조사 법정은 1967년 8월 3일 보고서를 발표해 참사의 책임이 국립석탄위원회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위원회 본부와 지역 위원회 인사 9명이 서로 다른 정도로 책임이 있다고 지목했고 어리석음과 무능, 의사소통 실패가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조직적으로 책임을 부인했고 공식적으로 징계받은 직원은 없었다. 보상금은 유가족에게 500파운드 수준으로 제시돼 비판을 받았다. 보고서는 이후 폐석 더미 전수 조사와 안전위원회 설치의 기초가 됐다.

19681건
  1. 남은 폐석 더미 철거 비용 논란과 1969년 폐석법

    참사 후 마을 위에 남은 폐석 더미를 치우는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를 두고 정부와 석탄위원회, 주민이 대립했다. 철거에는 약 25만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알려졌고 일부는 참사 기금에서 충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결국 기금에서 15만 파운드가 쓰였고 이 결정은 이후 오래 비판받았다. 1969년에는 광산·채석장 폐석 더미 관리를 규정한 법이 제정돼 폐기된 더미도 공공 위험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게 됐다. 이는 영국 산업안전 규제 체계 정비로 이어졌다.

19731건
  1. 엘리자베스 2세, 지역 사회 센터 개소식 참석

    197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애버펀 기금으로 지어진 지역 사회 센터 개소식에 참석했다. 센터와 기념 정원은 참사로 큰 상처를 입은 마을의 재건 상징이 됐다. 이후에도 여왕은 1997년 기념 나무를 심고 2012년 새 학교 개교식에 참석하는 등 마을과 관계를 이어갔다. 애버펀 기억은 매년 10월 21일 추모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이 참사는 산업재해 책임과 기업 은폐 문제를 논할 때 지금도 자주 인용된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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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웨일스 애버펀 석탄 폐석 더미 붕괴 참사, 어떤 사건인가요?
1966년 10월 21일 웨일스 머서 베일 탄광의 폐석 더미가 폭우 뒤 무너져 내려 애버펀 마을 초등학교를 덮쳤고 어린이 116명을 포함해 144명이 숨졌다. 국립석탄위원회의 안전 방치와 은폐적 대응이 조사 법정에서 드러나 영국 산업 안전과 규제 책임 논쟁의 상징이 됐다.
웨일스 애버펀 석탄 폐석 더미 붕괴 참사, 언제 일어났나요?
1958부터 1973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웨일스 애버펀 석탄 폐석 더미 붕괴 참사,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73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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